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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 샀더라. 무려 작년 말 쯤 이북(e-book)으로 샀던 기억인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 날 때 읽다보니 이제야 다 읽었다. 사실 책을 읽고 싶었던 계기는 이 책이 "언어가 점점 사라지는 세상"을 다룬 <1984>식 SF 소설이라는 말에 혹해서인데, 막상 읽어보니 그렇게 소개하기는 힘든 책이 아닌가 싶다.
한 가지 고해하자면... 나는 표지의 한자 - 결정(結晶) - 를 미처 못봐서 제목을 완전히 오해한 채로 읽었다. 쓰기 전에 리뷰 몇 개 찾아보니 나처럼 결정(決定)으로 멋대로 생각하고 읽은 분이 있더라.. 나쁜 오해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제대로 알고 읽었으면 이렇게까지 허탈하지는 않았을 텐데 싶기도 하다.
<은밀한 결정>은 차례차례 무언가가 소멸되어가는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소멸될 때는 그 개념과 존재 자체가, 즉 기억이 섬의 주민들에게서 사라지는데, 주민들은 그것을 이상하거나 슬프다고 느끼지 않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당연히 기억이 소멸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비밀 경찰'은 이들을 수색하여 잡아가기 때문에 기억하는 자 - 그러고보니 소설에서 이들을 어떻게 부르는지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 들은 숨어 지내야만 한다. 등장인물 중 '기억하는 자'는 주인공의 엄마, 그리고 소설가인 주인공이 투고하던 출판사 직원 R씨다. 엄마는 비밀경찰에게 끌려간 지 오래고, 주인공이 R씨에게 자신의 방 밑쪽에 은신처를 마련해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초반에 하나하나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이디어가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과연 언어가 사라지는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했는데 정확히는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사라지는 거였다. 언어가 사라진다기에 소통할 방식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그것을 결국 극복하는 얘기려나~ 기대했는데 이게 아니었다는 게 약간은 실망이었다고 해야하나. 누군가 이 소설을 SF라고 소개했고 또 '결정'을 오독하는 바람에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결정(決定)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긍정적이니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결국 주인공도 소멸을 이겨내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마도 소설이 끝난 뒤에 살아남은 것은 '기억하는 자'일 텐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R씨에게 지금이라면 비밀경찰도 당신을 잡아가지 않을 거라며 나가도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나는 이 결말을 보고 어쩌면 진주인공은 R씨가 아닐까 싶었다. 단편적으로 보면 무력감과 절망을 다룬 것 같지만 난 결말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R씨는 '생존자'고, 나가면 같은 생존자들이 있을 거고, 그 비밀 경찰조차도 신체를 잃어 죽어갔을 테고, R씨와 생존자들은 '기억'으로 새롭게 세상을 만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 결국 기억은 그 누구도 지울 수 없고 살아 숨쉰다는 메시지가 다가왔다. 책을 덮을 쯤엔 어두운 은신처의 뚜껑을 열고 빛을 마주하며 나가는 R씨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너무나 흔한 연출이지만... ㅎㅎ
나에게 '언어'란 사람이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언어가 사라지는 세계에 관한 소설"이라는 말에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소설에서도 단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 그리고 그 단어에 속하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가깝기도 하고. 이제와 생각해보니 '소설'이 사라지는 것이면 fiction만 사라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ㅋㅋ 이건 너무 얄팍하게 따지는 것 같고... 소설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책, 그리고 도서관까지 불태워 없애는 걸 보면 역시 사람들이 그 단어로 무엇을 떠올리는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주인공의 엄마는 조각가였는데, 그는 비밀 경찰에게 끌려가기 전에 소멸되어 볼 수 없는 것들을 조각품 안에 숨겨둔다. '은밀한 결정(結晶)'이라는 제목이 아마 조각품 - 은밀함을 상징 - 안에 숨겨둔 기억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는 '라무네 사탕'을 의미하는 것 같다. 입이라는 또다른 은밀한 공간에 넣으면 톡톡 터지면서 잠시나마 몰래 달콤한 기쁨을 주는 작은 알갱이.
주인공은 이것들을 보고, 느끼고, 들으면서 조금씩 아주 희미하게 기억을 떠올리지만 전부 떠올리지는 못한다. 다만 '소설'이 소멸당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을 겨우겨우 완성하기는 한다. 소설은 타자수(Typist)와 그의 스승이자 연인인 사람의 이야기다. 이 스승은 미친 인간이라, 연인인 타자수의 목소리를 빼앗고 자신이 없으면 살아나가지 못하도록 종내 시계탑에 가둬버린다. 여자는 점점 그 생활에 순응하다못해 탈출의 기회가 왔을 때도 스스로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명백하게 이 섬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한 소설 속의 소설. 두 이야기 모두 '나'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어쩌면 주인공이 소설을 완성한 것 자체는 인간의 어떤 의지를 상징하는 걸지도 모른다.
찾아보니 작가가 직접 <안네의 일기>를 오마주했다고 언급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아있고 결말 부분에서는 무력감 내지 허탈함을 주는 것 같다. 의도한 것 같지만. 원래도 축축한 분위기를 좋아해서 소설의 첫인상이 좋았다. 표현도 참 좋았던 게 많았고.
트럭의 전조등과 가로등과 눈이 어둠을 비추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도 주위는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눈이 밤공기와 스치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이 방에는 모든 기억이 보존돼 있잖아. 에메랄드, 지도, 사진, 하모니카, 소설, 뭐든지 다. 여기는 마음속 늪의 바닥이야. 기억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
하지만 ㅎㅎ ... 굳이 이 소설에 불륜 소재를 넣었어야하나?... 싶다.................... 나는 정말 중간에 너무 깜짝 놀랐다. 갑자기? 여기서요? 키스를요?.... 왜, 사라지는 것에 키스도 넣지 그러셨어요. 몰입이 갑자기 확 깨져서 이쯤부터 소설이랑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와중에도 주인공은 R씨의 아내에게 계속 R씨의 안부를 전해주는데, 이게 일본 소설 감성인가? 싶기도 하고.. 사랑에는 물론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작가가 의도한 건 세계와 단절된 소멸 생존자 R씨 &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이 싫은 주인공 사이의 어쩔 수 없는 유대감일 거라고 생각하긴 한다. 하지만 그게 꼭... 불륜이어야 했나 싶고... 아무래도....... 이 장치가 그렇게나 필요했나? 싶고... ㅋㅋ 소설 속의 소설과는 반대되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던 건가?.. 소설 속의 남자는 여자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심리적 지배를 하며 지내지만, R씨는 그와 반대로 갇혀있으나 여기서 가장 의지와 희망으로 가득찬 인물이라 그걸 대조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남자와는 달리 '나'(여성)한테 끊임없이 칭찬해주고 당신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독려하고... 음... 애써 좋게 포장해도 이혼하지도 않았으며 애까지 있는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암시는 정말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걸 뭐... 주인공이나 R씨가 힘들어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넘어감. 진지하게 다룰 게 아니라면 아예 넣지 않는 게 좋다 생각한다. 사랑의 형태가 여러가지니까 굳이 불륜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닐까요?! ㅠㅠ 아가페나 스토르게 정도로 표현했으면 좋았을텐데... FF14로 표현하자면 효월 잘 만들어놓고 제국과 제노스로 곤죽을 만들어 놓은 것과 비슷한 이치. ㅋㅋㅋㅋ
이외에도 설정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라든지 주인공이 너무나 무력한 점이 신경이 쓰였으나, 전자는 독자에게 오히려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고, 후자는 작가가 <안네의 일기>에 영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어느정도 납득했다. 진주인공이 R씨라고 생각하니 그런 주인공을 더 받아들이기 수월했다.
그래도 간만에 즐겁게 독서를 했다. (e-book도 북이다.) 즐거웠으니 이렇게나 길게 독후감을 쓴 거겠지. 너무 오랜만이라서. 하고 싶은 말이 이거보다 많았던 것 같은데 이 글마저도 3일에 걸쳐 작성한 거라 빼먹은 생각과 감정이 많은 것 같다... ㅠㅠ 원래 삘받았을 때 쭉 써야하는데.. 아쉽네. ㅎㅎ 글을 끝마친 것에 의의를 두자.
글이란 읽을 때도 쓸 때도 마음의 양식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느낌이 든다. 완독하면 뿌듯함도 느껴지고 생각지 못한 표현을 마주한다든지 마음이 울렁울렁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상당히 기분이 좋다. 조만간 또 비문학이나 소설을 하나 완독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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